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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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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세를 위해 10명의 친혈육을 죽여버린 무측천
2015년 01월 11일 11시 14분  조회:7257  추천:1  작성자: 넉두리

권세를 위해 10명의 친혈육을 죽여버린 무측천



(번역)



 

중국력사상에서 유일한 녀황제인 무측천은 잔인함과 총명, 광적인것과 랭정함을 한몸에 지닌 형상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녀는 초인간적인 지혜와 정치수단을 가진 동시에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렬했을뿐만아니라 잔인한 관리들을 등용하여 강경한 수단으로 자신의 무주왕조(武周王朝)를 다스렸다. 그녀는 심지어 포대기속의 친딸마저 목을 졸라 죽였다.
무측천은 예쁘고 책략이 뛰여났으며 권세를 탐하여 온갖 계략을 꾸며댔다. 그녀는 또 불교를 신봉했지만 황음무치했다. 그녀는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잔인하고 무정하게 권력과 리익을 위해 다투었으며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라면 사랑도 혈육도 모두 버릴수 있었다. 조숙한 무측천은 14살에 남녀의 일에 대해 알고있었다. 그해(정관 11년 즉 기원 637년)에 당태종은 미녀선발을 했는데 결과 무측천은 후궁으로 선발되여 입궁했다. 입궁하기전에 어머니 양씨가 통곡했지만 그녀는 매우 평온한 어조로 “천자를 만나면 복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오겠는데 슬퍼하게 뭔가요?”하고 말했다. 과연 당태종은 무측천을 보자마자 그녀에게 홀딱 반하여 사흘만에 “재인”으로 봉했다. 당조초기의 후궁제도에 따르면 재인은 정5품으로서 황제의 121명 처첩중에서 서렬 30위에 속하여 높지는 않았지만 낮지도 않았다. 더구나 이는 관례를 깨고 월급하여 승급시킨것이다.
당태종 리세민(기원 599년 1월 23일~ 기원 649년 7월 10일)은 나이가 무측천(기원 624년 2월 17일~기원 705년 12월 16일)의 아버지벌이 되였기에 무측천은 당태종과 한평생을 함께 보낼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처음에는 당태종의 총애를 받다가 점점 랭대를 받게 되자 무측천은 기타의 계략이 있는 비빈들처럼 당태종이 죽은후의 준비로 황자들중에서 뒤배를 찾기 시작했다.
당시 황자들중에서 가장 당태종의 총애를 받은 황자는 위왕 리태였다. 궁중에서 적지 않은 비빈들이 모두 리태의 비위를 맞추며 암암리에 그와 사통했지만 무측천만은 그녀들과 달리 앞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무측천은 나약하고 성실한 진왕 리치를 선택했다. 리치라면 앞으로 마음대로 조종할수 있을것이였기때문이다.
어느날에 무측천은 뒤간으로 가는 리치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금대야에 담은 물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손을 씻으라고 했다. 반쯤 무릎을 꿇고 애교가 넘치고 매혹적인 자태로 추파를 보냈다. 리치는 뜨겁게 달아오르는 욕정을 억누를수 없어 손을 씻는다는것이 그만 더운물을 무측천의 얼굴에 튕겨놓았다.
그 일이 있은후 “모자”는 당장에서 마른 장작에 불이 붙은것처럼 걷잡을수 없이 한몸으로 되여 붙어버렸다. 얼마후 무측천은 리치의 아이를 임신하였다. 때문에 《정사(情史)》에서는 리치를 “증(烝)”이라고 했다. 그 뜻은 아버지의 녀자와 성관계를 발생했다는것이다.
무측천은 당태종의 습성을 꿰뚫어보았다. 무측천의 계략에 따라 리치는 아버지 당태종에게 잘보이려고 갖은 애를 다 썼다. 당태종은 결국 리치를 태자로 봉했다. 당태종이 죽은후 리치가 황위를 이었는데 그가 곧 당고종이다. 당대후궁의 규정에 따라 무측천은 후궁을 떠난후 장안의 감업사 수선암에 출가하여 5년동안 녀승으로 되였다. 당시 25~26세였는데 한창 청춘이 발랄한 나이였다. 그해 당고종과 후비일행은 당태종의 사망5돐에 맞춰 감업사에 찾아와서 분향하고 복을 기원했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고있는 소숙비를 질투하고있던 왕황후는 무측천을 본후 몰래 사람을 파견하여 그녀를 다시 입궁시켰다. 그리고 무측천을 곱게 단장시켜 슬그머니 당고종의 침상으로 보냈다. 무측천의 힘을 빌어 소숙비를 견제하려는것이였다.
처음에 무측천은 겸손하게 례절을 지키면서 천방백계로 왕황후에게 아부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소숙비를 물리쳐버렸다. 하지만 무측천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온갖 방법을 다하여 왕황후의 자리를 빼앗으려고 했다. 무측천은 재물로 궁중의 태감과 궁녀들을 매수하여 왕황후의 일거일동을 살피게 했다.
무측천은 당태종의 재인으로 있을 때 독한 녀자로 소문났다. 그때 서역에서 당나라에 보마(宝马) 한필을 보내왔는데 매우 사나와서 젊고 힘센 남자들도 길들일수 없었다. 말을 잘 타기로 소문난 당태종도 그 말을 타다가 굴러서 땅바닥에 떨어졌다. 모두들 속수무책으로 있을 때 무측천이 나서서 말했다.
“천첩에게 세가지 물건만 주면 그 말을 다스릴수 있습니다.”
“무슨 세가지인가?”
당태종이 묻자 무측천이 대답했다.
“쇠채찍, 쇠망치, 칼입니다. 먼저 쇠채찍으로 가죽이 찢기도록 때리는것입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쇠망치로 죽도록 대갈통을 내리쳐야 합니다. 그래도 굴복시키지 못할 경우에는 칼로 숨통을 끊어버려야 합니다.”
당태종은 비록 전쟁터에서 반생을 보내면서 사람과 말을 수없이 죽였지만 무측천처럼 마음이 독하고 수단이 악렬한 녀자는 처음 보았다. 그래서 암암리에 무측천을 경계하였다. 사실 무측천은 사악하고 잔인했을뿐만아니라 독사같은 녀인이였다. 속담에 범도 제 새끼를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지만 무측천이란 흉악하고 잔인한 암펌은 자식을 잡아먹을었을뿐만아니라 뼈도 남기지 않고 삼켜버렸다. 무측천은 왕황후를 제거해버릴 한가지 독한 계략을 생각해냈다.
그 당시 무측천은 딸을 낳았는데 매우 령리하고 예쁘게 생겨 고종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왕황후도 아이를 낳지 못해 무측천의 딸을 매우 좋아했다. 어느날에 왕황후가 무측천의 거처로 찾아왔는데 무측천은 일부러 친절하게 황후와 한담을 하는척 하면서 기회를 타서 궁녀에게 꼬마공주를 안고오라고 시켰다. 왕황후는 기뻐서 아이를 안고 놀다가 아이가 잠이 들어서야 돌아갔다. 황후가 방금 문을 나섰을 때 궁녀가 달려들어와 황제가 온다고 아뢰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여긴 무측천은 잔인하게도 포대기속에서 자고있는 친딸의 목을 졸라죽였다. 그리고 어린 딸의 시신을 바라보며 “너는 제왕의 집에서 태여났지만 아쉽게도 이 에미의 전도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말한후 이불을 덮어버렸다. 그때 고종이 들어와서 이불을 열어보고 딸이 숨이 막혀 죽은것을 보게 되였다. 고종은 방금 누가 왔다갔는가고 물었다. 무측천은 울면서 황후밖에 왔다간 사람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고종은 비분하여 “황후가 내 딸을 죽였다!”고 소리쳤다. 고종은 즉시 조서를 내려 왕황후를 페위시키고 무측천을 황후로 봉했다. 얼마 안되여 무측천은 또 황제를 충동질하여 왕황후와 소숙비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했다.
황후가 된후 무측천은 자기의 네 오빠를 제발하여 높은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런데 네 오빠는 그녀의 작법에 대해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녀가 마음대로 조정을 뒤흔든다고 책망했다. 무측천은 대노하여 그들을 변방으로 류배시켰다. 그리고 도중에 핍박하여 그중 두 오빠를 자살하게 했다. 나머지 두 오빠도 하마트면 독해를 당할번 했다.
무측천의 친언니 한국부인은 남편을 잃은후 딸을 데리고 황궁으로 찾아왔다. 고종은 미모의 모녀를 보고 홀딱 반하여 후궁으로 들인후 무측천을 전보다 랭담하게 대했다. 어렵게 황후가 되여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 하던 무측천이 어찌 다른 녀자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있겠는가? 그 상대가 친언니고 외조카딸이라고 해도 용서할수 없는 일이였다. 한달후 한국부인은 갑자기 영문을 알수 없이 죽어버렸다. 고종은 무측천이 한 짓이라고 의심했지만 증거를 찾을수 없었다. 그래서 소홀함이 없이 한국부인의 딸 위국부인을 보호했다. 그후 다행히 죽을 고비를 넘긴 무측천의 두 오빠가 황궁으로 찾아오게 되였다. 무측천은 후궁에서 한상 차려놓고 두 오빠를 초대했는데 그 자리에는 고종과 위국부인도 있었다. 무측천은 직접 주방에 내려가 두 오빠가 가져온 물고기안에 독약을 넣었다. 그리고 그 물고기를 고종의 총애를 받고있는 위국부인에게 주었다. 그 물고기를 먹은 위국부인은 당장에서 일곱구멍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었다. 이렇게 자신에게 장애가 되는 외조카딸을 제거한 무측천은 두 오빠를 무함했다. 그녀는 두 오빠가 가져온 물고기에 독약이 들어있다고 하면서 시위에게 명령하여 두 오빠의 목을 베여버렸다. 이번에 그녀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본것이다. 눈앞의 련적을 제거하고 또 자신이 하는 행동을 반대할것이 뻔한 두 오빠를 처리해버린것이다.
당고종은 만년에 몸이 병약하여 황위를 무측천에게 양위하려고 했지만 군신들이 견결히 반대하는 바람에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고종은 무측천을 격노시킬수 없어 황위를 무측천이 낳은 아들 리홍에게 양위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무측천은 곧 실현하게 될 황제꿈이 깨여지는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녀황제로 되기 위해 친아들 리홍에게 독주를 먹여 죽여버렸다. 그후 고종은 무측천의 둘째아들 리현을 황태자로 봉하고 리현에게 국사를 맡겼다. 먼저 손을 쓰는것이 유리하다고 생각된 무측천은 또 하나의 친아들 리현을 핍박하여 죽여버렸다. 고종이 죽자 무측천은 혼자 권력을 쥐고 마음대로 할수 있게 되였다. 중종과 예종은 모두 선후로 각각 55일과 6개월의 상징적인 황제노릇밖에 못하고 무측천에 의해 페위당했다. 무측천은 당(唐)을 주(周)로 고치고 녀황제로 되였다.
사서의 기재에 따르면 무측천은 선후로 모두 딸 하나, 아들 둘, 오빠 넷, 언니 둘, 외조카딸 하나를 죽였다. 이 모든것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권력을 다투고 녀황제꿈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무측천은 음험하고 잔인하기를 극에 달했지만 공정하게 평가하면 녀황제로 된후 확실하게 진보적인 개혁조치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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